경제학은 일상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보통 경제학이라고 하면 ‘생산, 분배, 소비’ 같은 교과서적 정의나 전문가들이 다루는 복잡한 수식과 지표들을 떠올린다. 이 때문에 경제학이 평범한 개인의 삶과는 다소 거리가 먼, 고상하고 엄숙한 학문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그러나 관점을 바꾸어 보면 경제학은 그렇게 거창할 필요가 없는 학문이다. 경제학의 정의를 내릴 때, 복잡한 이론 대신 근대 경제학의 기틀을 닦은 알프레드 마셜(Alfred Marshall)의 문장을 전면에 내세우고 싶은 이유가 여기 있다.

“경제학은 인간의 일상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경제학의 정의는 이 한 문장으로 충분하다. 19세기 후반, 경제학이 지나치게 추상적인 이론으로 치우치는 것을 경계했던 마셜은 학문의 시선을 다시 인간에게로 돌리고자 이 말을 남겼다. 그가 바라본 경제학의 본질은 책상 위의 정교한 숫자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궤적에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일상’이란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먹고사는 문제’다. 아침에 출근해 노동력을 제공하는 행위(생산)는 경제학의 출발점이며, 흘린 땀의 대가로 월급을 받아 생활비를 쪼개는 행위(분배)는 경제학의 중심축이다. 마트에서 물건을 사거나 카페에서 돈을 쓰는 행위(소비)는 경제학의 종착지다. 오늘 점심은 무얼 먹을까, 이 물건을 사는 게 합리적일까 고민하는 사소한 순간들이 전부 우리의 일상이다.

이 평범한 일상을 들여다보면 경제학자들이 연구해 온 수많은 이론과 법칙이 이미 그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있음을 알 수 있다.

마트 마감 직전 세일 상품에 사람들이 몰리는 풍경은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며, 뷔페식당에서 접시를 비울수록 만족감이 점차 줄어드는 경험은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창업을 고민할 때 저울질하는 득실은 ‘기회비용’과 ‘매몰비용’의 원리로 설명된다. 우리가 체감하는 장바구니 물가와 일자리 걱정 역시 거시경제학의 핵심인 ‘인플레이션’과 ‘실업 이론’의 영역이다.

결국 교과서에 등장하는 거창한 경제학 개념들도 따지고 보면 수많은 사람이 일상 속에서 먹고살기 위해 내리는 선택들을 보기 좋게 분류하고 정리해 둔 것에 불과하다. 일상을 떠난 경제학은 존재할 수 없다.

일상이란 매일 반복되기에 평범해 보이지만, 동시에 한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가장 치열하고 중요한 무대다. 그러므로 경제학을 어렵고 엄숙한 학문으로만 바라볼 필요는 없다. 경제학은 차가운 수식이 아니라, 당장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가장 소중한 ‘먹고사는 이야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마셜의 말처럼 경제학의 진짜 무대는 언제나 우리의 일상 속에 있다.

만약 한국은행이 국민은행을 통폐합해버린다면?

정부가 금융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겠다며 전국의 모든 시중은행을 없애고, 한국은행 하나로 통폐합한다고 가정해 보자. 동네마다 행정복지센터가 있듯 한국은행 지점이 들어서고, 국민은 그곳에서 직접 예금과 대출을 한다. 국가가 운영하니 수수료도 없고 대출 이자도 획기적으로 낮아질 것만 같다.​​얼핏 완벽해 보이는 이 ‘직거래 시나리오’는 왜 현실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에서 철저히 배제되었을까. 이 극단적인 상상은 중앙은행과 상업은행의 이원화된 시스템이 왜 자본주의의 근간을 이루는지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이 효율성 이면에는 경제의 동맥경화, 나아가 체제 붕괴라는 치명적인 청구서가 숨어 있다.​​

실패로 끝난 거대한 실험, 동구권의 단일은행 체제​​

이 아이디어는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인류 역사에서 이미 철저하게 실패로 끝난 거대한 경제 실험이다. 과거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은 자본주의 상업은행의 ‘이윤 추구’를 비판하며 단일은행제도(Monobank system)를 도입했다. 국가 소유의 거대한 중앙은행이 화폐 발권부터 기업과 개인의 여수신(예금과 대출) 업무까지 금융의 모든 기능을 독점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시장의 가격 메커니즘(수요와 공급, 금리)이 아닌 ‘정치적 목적’과 ‘국가 경제 계획’에 따라 자금이 배분되었다. 은행은 수익성과 리스크를 평가할 유인이 없었으므로 자원 배분의 효율성은 바닥을 쳤다. 실적이 없는 국영 기업에 정치적 이유로 자금을 계속 투입했고, 파산해야 할 기업이 연명하면서 부실은 거대한 국립 은행으로 고스란히 전가되었다. 이 부실을 덮기 위해 은행은 통화량을 무분별하게 늘렸고, 이는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국가 부도로 이어졌다. 자본주의가 중앙은행과 상업은행을 철저히 분리하는 이유는 이 쓰라린 역사적 교훈과 맞닿아 있다.

​​심판과 선수의 분리, 거시와 미시의 역할 분담​​

중앙은행이 민간 거래를 하지 않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역할의 충돌’을 막기 위해서다. 중앙은행은 전체 경제의 통화량을 조절하고 물가를 안정시키는 ‘심판’이며, 민간은행은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시장에서 뛰는 ‘선수’다.​ 발권력을 가진 중앙은행이 직접 시장 플레이어로 나서면, 무한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금리 경쟁을 주도하게 되고 기존 민간은행은 모두 구축되어 파산한다.​

더 큰 문제는 중앙은행의 본원적 기능이 마비된다는 점이다. 한국은행은 “거시(Macro) 경제 지표에 따라 통화 정책을 어떻게 펴야 할까”를 고민하는 기관이다. 만약 중앙은행이 수천만 명의 대출 심사, 담보 평가, 연체 관리 등 미시(Micro)적 리스크 관리에 행정력을 소모하게 된다면, 국가 경제 전체를 조율하는 통화 정책의 정교함은 붕괴할 수밖에 없다.​​

창조적 파괴를 이끄는 모험 자본의 실종​​

행정복지센터의 주민등록등본 발급은 동질적인 공공 서비스지만, 금융은 본질적으로 ‘미래의 불확실성에 자본을 쏟는 행위’다. 자본주의 경제의 역동성은 여기서 출발한다.​​

관료화된 거대 단일 은행은 리스크를 회피한다. 대출 부실이 발생하면 책임 추궁을 받기 때문에, 가장 안전한 대기업이나 확실한 우량 담보가 있는 경제 주체에게만 자금을 공급한다. 반면, 주주 이익을 극대화해야 하는 민간 상업은행은 다르다. 이들은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치열하게 새로운 산업 트렌드를 분석하고, 유망한 벤처기업의 기술력을 평가하여 모험 자본을 공급한다.​​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가 강조한 자본주의 발전의 원동력인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는 이윤 동기에 의해 움직이는 민간 금융 시스템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다. 단일 은행 체제에서는 혁신 기업에 자금을 수혈하는 이 혈맥이 끊어지며, 경제 전체의 성장 동력이 서서히 식어버린다.​​

위기 시 최후의 보루, 최종대부자의 상실​​

마지막으로, 금융 시스템을 지키는 최종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 기능이 사라지는 치명적 위험이 존재한다.​​부분지급준비제도를 채택하는 현대 금융 시스템에서는, 경제에 충격이 발생해 대규모 예금 인출 사태(뱅크런)가 벌어지면 아무리 건전한 상업은행도 흑자 부도를 맞을 수 있다. 이때 중앙은행은 완벽하게 독립된 위치에서 무제한의 유동성을 공급해 금융 시스템의 붕괴를 막아내는 최후의 소방수 역할을 한다.​​

그런데 중앙은행이 직접 개인 및 기업과 거래를 하다가 거액의 부실을 떠안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중앙은행을 구원해 줄 상위의 기관은 존재하지 않는다. 발권력을 동원해 스스로 부실을 메우는 순간, 그 국가의 통화 신뢰도는 바닥으로 추락하고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며 화폐 시스템 자체가 무너진다. 중앙은행이 민간 거래와 거리를 두고 완벽한 건전성과 독립성을 유지해야만, 국가적 경제 위기 상황에서 강력한 구원투수로 등판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