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연간 수출 7,000억 달러 달성은 기록적인 성과다. 국회예산정책처가 짚었듯이, 한국은 2025년 7,093억 달러를 기록하며 미국, 독일, 중국, 일본, 네덜란드에 이어 세계 여섯 번째로 ‘7,000억 달러 수출국’ 반열에 올랐다. 다만 이 성과를 곧바로 “수출 체질의 승리”로 해석하는 데에는 신중해야 한다. 보고서가 강조하듯 이번 기록에는 반도체 가격 급등이 크게 작용했으며, 오히려 반도체를 제외한 수출은 감소했다는 점에 더 주목해야 한다.
실제로 최근의 흐름을 보더라도 한국 수출은 여전히 반도체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2026년 1월과 2월 수출은 각각 658억 5,000만 달러, 674억 5,000만 달러로 큰 폭의 증가세를 보였으나, 이 중 2월 반도체 수출(251억 6,000만 달러)이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며 성장을 주도했다. 같은 달 ICT 수출 또한 전년 동월 대비 103.3% 급증한 336억 2,000만 달러를 기록하며 전체 수출의 49.8%를 차지했다. 겉으로는 눈부신 숫자지만, 실상은 한국 수출 증가분의 절반 가까이를 반도체가 떠받치고 있는 셈이다. 이는 호황기의 자신감보다는, 업황 하강 시 더 크게 흔들릴 수 있는 구조적 취약성으로 읽어야 마땅하다.
설상가상으로 향후 통상 환경은 7,000억 달러를 달성할 당시보다 더욱 녹록지 않다. WTO는 2025년과 2026년 세계 상품무역 증가율을 각각 0.9%, 1.8% 수준의 저성장에 머물 것으로 내다봤다. IMF 역시 2026년 세계 성장률을 3.1%로 전망하며 관세 장벽과 정책 불확실성을 주요 하방 리스크로 꼽았다.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에 ‘세계 교역의 완만한 증가’보다 무서운 것은 ‘높은 불확실성의 장기화’다. 이제는 수출 총액이라는 외형보다, 어떤 품목과 시장에서 얼마만큼의 회복탄력성을 유지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이 지점에서 독일의 교훈은 뼈아프다. 독일은 한때 독보적인 제조업 경쟁력과 글로벌 분업의 수혜를 입으며 유럽 최강의 수출국 지위를 지켰으나, 최근 높은 에너지 가격, 숙련 노동력 부족, 낮은 생산성, 디지털 전환 지연이 겹치며 경쟁력이 약화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OECD는 독일의 부진 배경으로 제조업 경쟁력 저하와 혁신 역동성 상실을 지목했고, 독일 연방은행 또한 2026년 초의 회복세가 미약할 것으로 진단했다. 한국이 현재의 제조 우위를 당연하게 여기는 순간, 독일의 오늘은 한국의 내일이 될 수 있다.
일본의 사례 또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본은 7,000억 달러 수출국에 오른 뒤에도 강한 제조업 기반을 유지했으나, 고령화에 따른 노동력 감소와 구조개혁 지연, 더딘 디지털 전환에 발목을 잡혔다. IMF는 일본의 잠재성장률이 0.5% 수준에 머물 것으로 보고 생산성 개선과 여성·고령층의 노동 참여 확대, AI 활용을 핵심 과제로 제시했다. 일본 경제산업성 역시 2025년 백서를 통해 보호무역과 디지털 경쟁 속에서 부가가치 극대화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한국이 ‘반도체 낙관론’에 안주한다면, 일본식 장기 정체의 그림자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결국 한국 수출의 다음 10년은 “얼마나 더 팔 것인가”보다 “무엇을, 어디에, 어떤 구조로 팔 것인가”에 성패가 달려 있다. 반도체의 경쟁력은 지켜내되, 자동차와 선박을 비롯해 바이오, 방산, 문화소비재, 산업 소프트웨어 및 제조 AI까지 포트폴리오를 과감히 넓혀야 한다. 특정 국가에 편중된 시장 구조를 아세안, 인도, 유럽 등으로 다변화하는 체질 개선도 필수적이다. 2026년 2월 대미·대중·대아세안 수출이 동반 증가한 것은 긍정적이지만, 이것이 일시적 호황에 그치지 않으려면 산업 고도화가 병행되어야 한다. 7,000억 달러는 종착지가 아니다. 한국 수출이 독일처럼 전환의 타이밍을 놓치거나 일본처럼 구조개혁의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려면, 향후 10년은 ‘수출 규모의 시대’를 넘어 ‘수출 구조의 시대’로 진입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