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기사나 기업의 발표, 정치권의 성명서에서 가장 흔하게 남발되는 단골 수식어가 있다. 바로 ‘뼈를 깎는 노력’, 혹은 ‘뼈를 깎는 쇄신’이다. 무언가 잘못을 저질렀거나 거대한 위기에 직면했을 때,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뼈를 깎아내겠다는 극단적인 다짐을 발표하곤 한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육체적 고통을 수반하는 이 말을, 그들은 참으로 경솔하고도 쉽게 입에 올린다.
원래 ‘뼈를 깎는다’는 뜻의 각골(刻骨)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처절한 원한이나 은혜, 혹은 도저히 씻을 수 없는 반성을 몸에서 가장 깊고 단단한 곳에 새겨 절대 잊지 않겠다는 극한의 정신 상태를 비유한 말이다. 삼국지에서 독화살을 맞은 명장 관우가 화타에게 팔을 내어주고 뼈를 긁어내는(刮骨) 수술을 받으면서도 바둑을 두며 버텼다는 일화처럼, 이는 초인적인 인내와 처절함을 상징하는 단어였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현대 의학적 반전이 하나 있다. 과연 진짜로 뼈를 깎으면 얼마나 아플까? 놀랍게도 뼈 자체에는 통증을 느끼는 신경이 없다. 정형외과나 성형외과 수술에서 의료용 톱이나 드릴로 뼈를 아무리 깎아내도 뼈 자체는 아무런 비명도 지르지 않는다.
진짜 지옥 같은 고통과 피눈물은 뼈를 깎는 행위가 아니라, 그 뼈에 도달하기 위해 겉을 감싸고 있는 멀쩡한 살집을 째고, 근육을 가르고, 예민한 신경이 촘촘하게 분포된 ‘골막’을 벗겨내는 ‘그 전의 과정’에서 온다. 즉, 뼈를 다듬는 알맹이의 단계로 가기 전에 이미 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처절한 대가와 진통을 먼저 치러야 한다는 뜻이다.
이 의학적 본질을 최근의 한 사건에 대입해 보면, 우리가 마주하는 사회적 선언들이 얼마나 거대한 모순이자 기만인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바로 어제, 북중미 월드컵에서 역대 최악의 성적으로 조별리그 탈락을 맞이한 대한축구협회의 기자회견이 그랬다. 박항서 부회장은 고개를 숙이며 “축구협회는 뼈를 깎는 반성과 성찰로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대표팀의 몰락을 바라보는 축구 팬들의 가슴을 달래기 위한 무거운 표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통찰에 비추어 볼 때, 이 발언은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축구협회가 진짜로 ‘뼈를 깎는’ 단계에 가려면, 그 전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동안 누려왔던 독단적인 권력, 인사권, 이권이라는 두꺼운 기득권의 ‘살집’부터 칼로 찢어내야 한다. 무능한 수뇌부가 전원 사퇴하고 인적 청산이라는 피를 흘리는 고통스러운 ‘전 과정’을 기꺼이 감내해야 비로소 뼈가 드러나는 법이다.
그러나 그들은 늘 그랬듯 감독 한 명을 경질하는 선에서 꼬리를 자르고, 자신들의 밥그릇과 살집은 털끝 하나 안 다치게 꽁꽁 싸매고 있다. 정작 가장 아프고 피가 철철 흐르는 ‘살 째기’는 무서워서 엄두도 못 내면서, 통증조차 없는 내부의 뼈를 깎아 미래를 바꾸겠다고 호언장담하는 꼴이다.
결국 기득권은 단 1mm도 내려놓지 않으면서 입으로만 처절한 척하는 이들의 ‘뼈를 깎는 쇄신’은, 고통을 모르는 자들의 비겁한 연막탄일 뿐이다. 진짜 쇄신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내 살점을 먼저 도려내겠다는 서슬 퍼런 칼날을 쥐는 것에서 시작된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자들의 ‘뼈 타령’을 이제는 더 이상 믿어줄 수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