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경제] 2월 2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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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매카시의 휠링 연설과 매카시즘의 전개

1950년 2월 9일, 미국 공화당 조셉 매카시 상원의원은 웨스트버지니아주 휠링에서 국무성 내에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암약하고 있다는 명단을 갖고 있다고 발표했다. 이 발언은 냉전 초기 소련의 핵실험과 중국 공산화로 고조되었던 미국 내 불안 심리를 자극했다. 이를 기점으로 증거 유무와 상관없이 공산주의 부역자를 색출하려는 대대적인 반공주의 선풍, 즉 매카시즘이 시작되었다.

이후 수년간 공직 사회를 비롯해 문화, 예술, 교육계 전반에서 광범위한 사상 검증이 이루어졌다. 수많은 인사가 공산주의자로 지목되어 청문회에 소환되었으며, 그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직업을 잃거나 사회적 낙인이 찍히는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매카시가 주장한 명단의 실체는 명확히 확인되지 않았으며, 그의 무분별한 폭로는 점차 정치적 신뢰를 잃기 시작했다.

매카시즘은 1954년 미 육군을 대상으로 한 청문회에서 매카시의 고압적인 태도와 허위 사실 유포가 생중계되며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미 상원은 같은 해 12월 매카시에 대한 견책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소멸했다. 1950년 2월 9일 시작된 이 사건은 정치적 선동이 사회 전체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개인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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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테란 조약 체결과 바티칸 시국의 탄생

1929년 2월 11일, 이탈리아 왕국의 베니토 무솔리니 정부와 가톨릭 교황청은 라테란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1870년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교황령을 상실한 이후 지속되어 온 이탈리아 정부와 교황청 사이의 갈등, 이른바 ‘로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맺어졌다. 이로써 교황청은 로마 내 일부 영토에 대한 주권을 인정받아 독립 국가인 바티칸 시국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라테란 조약은 세 개의 주요 문서로 구성되었다. 첫째는 바티칸 시국의 완전한 독립과 주권을 인정하는 정치적 조약이며, 둘째는 교황청의 영토 상실에 대한 경제적 보상을 규정한 금융 부속서, 셋째는 이탈리아 내에 서 가톨릭교의 지위를 규정한 정교 협약이다. 이 협약을 통해 가톨릭은 이탈리아의 국교로 인정받았으며, 교황청은 이탈리아 내부 문제에 정치적으로 개입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이 조약은 국제법상 교황청의 독자적인 지위를 확립하고 종교적 권위를 세속 국가로부터 분리하는 법적 토대가 되었다. 무솔리니는 가톨릭계의 지지를 얻어 정치적 안정을 꾀했고, 교황청은 실질적인 영토와 주권을 회복 하며 전 세계 가톨릭교회의 행정적 중심지로서 기능을 공식화했다. 라테란 조약은 현재까지도 바티칸 시국과 이탈리아 공화국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핵심적인 법적 근거로 유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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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조의 멸망과 중국 제국 시대의 종결

1912년 2월 12일,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가 퇴위 선언을 함으로써 약 270여 년간 지속된 만주족의 지배와 2,000년 넘게 이어진 중국의 전제 군주제가 종결되 었다. 이는 1911년 발생한 신해혁명의 결과로, 쑨원이 이끄는 혁명 세력과 청조의 실권자였던 위안스카이 사이의 정치적 타협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로써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구가 정식으로 출범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푸이의 퇴위는 ‘청실 우대 조건’을 전제로 진행되었다. 이에 따라 황제는 통치권은 포기하되 황제 칭호를 유지하며 자금성에 계속 거주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 았다. 그러나 이 타협안은 전통적인 황제 체제의 상징 성은 유지한 채 권력의 주체만 이동시킨 결과를 낳았으 며, 이후 중국은 군벌 할거 시대와 극심한 정치적 혼란 기를 겪게 되었다.

청 제국의 붕괴는 단순히 한 왕조의 멸망을 넘어, 전통 적인 동아시아 질서의 중심이었던 중화 제국 체제가 근대적 국민 국가 체제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한다. 6세의 어린 나이에 퇴위한 푸이의 삶은 이후 만주국 황제 추대와 전범 수용소 수감 등을 거치며 중국 근현대사의 격동을 상징하는 지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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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의 탄생과 1인 미디어 시대의 개막

2005년 2월 14일, 전직 페이팔 직원들인 채드 헐리, 스티브 첸, 자베드 카림이 동영상 공유 플랫폼 ‘유튜브 (YouTube)’의 도메인을 등록하며 서비스의 시작을 알렸다. 이전까지 인터넷상에서 개인이 영상을 공유하는 것은 기술·비용적 장벽이 높았으나, 유튜브는 별도의 소프트웨어 설치 없이 웹 브라우저에서 직접 영상을 재생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며 급격히 성장했다.

초기 유튜브는 간단한 개인 기록 영상을 공유하는 수준 이었으나, 2006년 구글에 인수된 이후 전 세계적인 동영상 표준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다. 누구나 콘텐츠를 제작하고 배포할 수 있는 시스템은 전통적인 미디어 권력을 해체하고 ‘1인 미디어’라는 새로운 산업을 창출했다. 또한 정보 습득의 방식이 텍스트와 이미지 중심에서 영상 중심으로 이동하는 디지털 미디어 환경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었다.

유튜브의 성장은 문화적 파급력뿐만 아니라 사회적 소통 방식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전 세계 사용자들이 시공간의 제약 없이 정보를 공유하게 되면서, 특정 지역의 문화 콘텐츠가 실시간으로 세계적인 현상이 되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2005년 발렌타인 데이에 시작된 이플랫폼은 현재 단순한 서비스 모델을 넘어 현대인의 일상과 정보 생태계를 규정하는 핵심 매체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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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파로프와 딥 블루의 대결, 인공지능의 부상

1996년 2월 10일, 체스 세계 챔피언 가리 카스파로프와 IBM의 슈퍼컴퓨터 ‘딥 블루(Deep Blue)’ 간의 역사 적인 첫 번째 대국이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이는 인간의 지적 영역을 대표하는 체스 분야에서 최정상급 인류와 기계가 맞붙은 최초의 본격적인 대결로 기록되었다. 총 6차례 진행된 이 대국에서 첫 판은 딥 블루가 승리하며큰 충격을 안겼으나, 최종 결과는 카스파로프가 3승 2 무 1패로 승리하며 인간의 우위를 지켰다.

당시 딥 블루는 초당 1억 수의 행마를 계산할 수 있는 막강한 연산 능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인간 고유의 영역 으로 여겨졌던 전략적 판단과 직관에 도전했다. 첫 판 의 패배는 기계가 특정 규칙 기반의 지능 경기에서 인간을 이길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실증한 사건이었다. 비록 1996년의 승리는 인간에게 돌아갔으나, 이 대결은 인공지능(AI) 기술이 단순 연산을 넘어 복잡한 의사결정 단계로 진입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이 사건은 인공지능 발전사에서 중대한 분기점이 되었 다. 이듬해인 1997년, 성능이 개선된 딥 블루가 재대 결에서 카스파로프를 최종 승자로 꺾으면서 인공지능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1996년 2 월의 대국은 인간과 기계의 공존 및 기술적 한계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훗날 딥러닝과 알파고 등으로 이어지는 현대 인공지능 혁명의 상징적 서막 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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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혁명의 완성과 이슬람 공화국 수립

1979년 2월 11일, 이란의 이슬람 혁명 지도자 루홀라 호메이니가 이끄는 혁명 세력이 수도 테헤란을 장악하며 친미 성향의 팔레비 왕조가 무너졌다. 2월 1일 망명 지인 프랑스에서 귀국한 호메이니는 열흘간의 유혈 사태 끝에 임시 정부를 수립하고, 군부의 중립 선언을 끌어내며 혁명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로써 이란은 2,500 년 넘게 이어진 군주제를 폐지하고 이슬람 신정 체제로의 전환을 맞이했다.

이 혁명은 서구화와 세속화를 추진하던 ‘백색혁명’에 대한 반발과 경제적 불평등, 그리고 팔레비 국왕의 독재에 대한 저항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했다. 혁명 성공 이후 이란은 이슬람 법학자가 최고 권력을 갖는 ‘벨라야테 파키(Velayat-e Faqih)’ 원리에 기초한 새로운 헌법을 채택했다. 이는 종교 지도자가 국가 운영의 전권을 장악하는 독특한 통치 구조의 시작이었으며, 중동 지역의 지정학적 구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이란 혁명은 단순히 한 국가의 정권 교체를 넘어 전 세계 이슬람권과 국제 정세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란의 반미(反美) 노선 천명은 제2차 오일쇼크와 미 대사관 인질 사건으로 이어졌으며, 중동 내 친미-반미 진영 간의 대립을 심화시켰다. 1979년 2월의 이 사건은 종교가 근대 정치의 핵심 동력으로 재등장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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